Tsunesaburo
Makig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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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글과 논평

1903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 창가학회 초대 회장이 자신의 첫 주요 저작 『인생지리학』을 출간했을 당시, 일본에서 중등 교육을 받는 여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마키구치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통신 강좌를 실시했으며, 여성 교육을 위한 잡지 출판과 비영리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이 연구는 일본 여성 교육의 초기 단계에 마키구치가 여성 교육에 끼친 영향을 심층 분석하고자 한다.

마키구치는 32세의 나이에 수많은 역경을 딛고, 1903년 10월 15일 『인생지리학』을 출간했다. 연구 범위와 완성도로 호평을 받으며 32개의 신문과 잡지에 서평이 실렸다. 출간 몇 달 뒤, 그는 어린 자녀와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도쿄고등사범학교 동창회인 명계회(茗渓会)의 간사로 일하며, 명계회 정기 간행물 『교육』의 편집도 맡았다. 또한 고분학원(대학)에서 중국 유학생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5년 5월, 마키구치는 잡지 『교육회』에 연재된 패널 토론에서 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오랫동안 교육에 종사해왔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이는 명계회에서 일하며 교실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으로 추측된다.

사실 그 몇 달 전인 3월부터 마키구치는 도쿄 간다구 키지마치에 있는 도아(東亞)여학교에서 지리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1904년 5월 도아불교연맹에 의해 도아세이카(精華)여학교로 설립되었고, 같은 해 8월 도아여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마키구치가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을 무렵, 도아여학교는 중국인 여자 유학생 집중 교육 부서를 신설했다. 마키구치 또한 고분학원에서 유학생을 가르친 풍부한 경험 덕분에 채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키구치와 학교 경영자 다나카 히로유키 공통 인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1906년 9월, 도아여학교가 시타야구 기타나리초로 이전했고, 마키구치는 옮긴 곳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다. 도아여학교는 전성기에도 학생 수가 4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였으며, 다이쇼시대(1912-25) 초반까지 운영되었다. 1905년 5월, 마키구치는 ‘대일본 여자속성교육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 협회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중등교육을 제공하는 통신 과정을 운영했으며, 월 2회 강의 기록과 월간지《대가족》을 배포하였다. 초기 교육 프로그램은 2년 과정이었으나, 이후 1년 반 과정으로 단축되었다.
마키구치는 협회 2인자 격인 편집장이었다. 협회 사무총장은 도쿄교육청 장학사였던 하마 고지로였는데, 그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892년부터 3년간 홋카이도사범학교에서 근무했다. 마키구치 또한 1893년에 홋카이도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따라서 하마는 마키구치의 옛 선생님이자, 교육 현장에서는 선배교사로 활동한 동료였다. 그리고 도쿄에서 마키구치를 비교적 깊이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마는 도쿄교육청 장학사 직무를 우선 수행해야 했으므로, 협회의 실질적인 운영과 행정은 대부분 마키구치에게 위임되었다. 1907년 12월에 발행된 《대가족》 제3권 제1호에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편집 및 발행"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대가족》은 국제 사회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주로 소개했다. 잡지 명칭은 여성들이 좁은 의미의 ‘가족’ 개념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춘 독립적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대일본 여자속성교육회’는 남녀고등사범학교 및 도쿄도립사범학교 출신의 우수한 교사진을 확보했다. 교사 명단에는 요시다 야헤이, 이코마 만지, 미네기시 요네조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명계회 임원이자 고분학원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키구치와 인연이 있었다. 마키구치는 협회에서 세계지리 과목을 담당했다. 이 협회의 전신은 ‘대일본 여성교육회’로, 여성들을 위한 통신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여성강좌』 등의 교재를 출판했다. 이 교육 과정의 명칭에 “속성(速成)”이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은 마키구치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이러한 명칭 변경은 협회의 교육적 지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속성교육’이라는 개념은 일반교육 및 교양교육을 포함하는 보다 심화된 학습을 지향했다. ‘여성속성과정’에서는 가정학, 바느질, 요리, 다도, 꽃꽂이 등의 실습 과목이 포함되었으나, 협회 설립 당시 신문 광고에는 가정학과와 바느질만이 명시되었다. 협회의 설립 목적은 지리, 역사, 영어 등과 같은 교과를 제공함으로써, 엘리트 계층 출신이 아닌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폭넓은 세계관과 교양을 갖도록 육성하는 데 있었다고 판단된다.

해당 신문 광고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이제 신흥국가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은 현모양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마키구치의 저서 『인생지리학』이 지향했던 바와 일치하며, 마키구치는 해당 저작을 통해 세계 시민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시각을 함양하고자 했다. ‘대일본 여자속성교육회’는 그러한 이상을 세계 인구의 절반을 구성하는 여성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지혜롭고 자율적인 여성을 양성하는 것은 마키구치와 동료들이 추구한 교육 이상의 핵심이었다. 이 협회는 러일전쟁(1904-1905) 중에 설립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데 따른 깊은 사회적 슬픔과 상실감에 쌓여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키구치와 동료들은 젊은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에 따라 협회를 설립했다.
‘여자속성강좌’ 광고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교사들은 “오랜 고심 끝에 고안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접근성 높은 통신 교육 과정을 제공하며, 이는 학습자 중심의 이해하기 쉬운 커리큘럼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더불어 유명한 관광지인 타키노 강에서 단풍놀이, 추첨, 오락 행사 등 사교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학습자 간의 교류와 정서적 유대 형성도 도모하고자 했다.

반나절 학교제도

마키구치가 ‘대일본 여자속성교육회(이하 여자교육회)’를 창립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그가 남긴 두 가지 발언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1907년 10월, 가와고에중학교 강연에서 마키구치는 많은 여성들이 학습과 자기계발에 강한 열망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할 적절한 수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 남학생들이 다니는 야간학교는 여학생들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 교육기관은 대체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교외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통학하거나 기숙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가정의 여성들에게는 사실상 교육 기회가 없었고, 이들은 어린 시절 교육받을 기회를 상실한 채 평생을 배움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마키구치는 이러한 현실이 여성들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여자교육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마키구치 자신 또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기에, 교육을 받고자 하는 소녀들의 좌절에 더욱 깊은 공감과 연대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동기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교육회(敎育會)’ 패널 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근대 학교 교육 체제의 유해한 영향을 거듭 지적하였고, 그 대안으로 ‘반나절 학교제도’를 적극 제안하였다. 마키구치는 교육 인프라의 확충에 따라 학문적으로는 뛰어나지만 그 학문이 정작 자신이나 사회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고, 신경쇠약이나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마키구치는 이러한 현상이 교육이 직면한 핵심 문제라고 지적하며, 인생에서 약 20년에 달하는 시간을 오로지 학습에만 전념하도록 설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마키구치는 ‘반나절 학교제도’를 제시한다. 이는 사람들이 하루 중 절반의 시간을 학습에, 나머지 절반을 노동에 할애하며, 이와 같은 학습-노동의 균형 있는 패턴을 평생에 걸쳐 지속해 나가는 형태의 교육 모델이다. 다시 말해, 마키구치는 20세기 초에 이미 평생학습사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접근을 시도한 선구적 교육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자교육회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5년 10월 1일자 『만조보(萬朝報)』에 게재된 광고에는 “6월 창간 이후 구독자 1만 명 돌파를 기념하여...”라는 문구가 실려 있으며, 마키구치는 협회가 설립 4개월 만에 순조롭게 궤도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같은 해 11월 명계회를 사임하고 여자교육회 활동에 전념한다.
1906년 3월, 여자교육회는 설립 당시 위치였던 간다구 미사키마치에서 고이시카와구 스이도초로 이전한다. 같은 해 1월부터 매월 셋째 주 일요일에 수공예 강습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기존 장소에서는 많은 수강자를 수용할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자교육회는 이후 꾸준히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11월 11일자 『만조보』에는 “큰 호응을 얻으며 이미 구독자 수가 2만 명을 돌파했다”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여자속성강좌’에 대한 광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07년 가와고에 강연에서 마키구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고, 어느덧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기에 품었던 이상 중 극히 일부분조차 실현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박하고 진실된 열정은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고 지지를 얻어, 다행히도 이제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세이쿄신문』이 간행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전기』에 따르면, 이 무렵 마키구치는 아는 사람의 재정 보증을 섰다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하며, 이러한 상황이 그의 당시 발언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소녀협회

마키구치는 고이시카와로 이전한 이후인 1907년 2월경부터 시모다 우타코가 회장을 맡고 있던 ‘일본소녀회’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05년 6월에 설립되었으며, 일본에서 두 번째로 창간된 소녀 대상 잡지 『일본소녀』를 발행했다. 출판사 사무실은 당초 우시고메구에 있었으나, 1907년 2월경 마키구치가 소속되어 있던 여자교육회가 위치한 고이시카와구 스이도초로 이전하였다.
마키구치가 일본소녀회 총책임자로 재직하던 시기의 『일본소녀』 내용을 통해 보면, 그는 도쿄 지역의 초등학교, 유치원, 기타 장소에서 소녀들과 주기적으로 토론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교류를 교육적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잡지에는 일본소녀회 소속 소녀들과 여자교육회 소속의 젊은 여성들 간에 이루어진 토론회 내용이 자주 소개되었으며, 『일본소녀』는 이와 같은 모임을 개최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전국의 소녀들에게 그러한 모임을 주도적으로 조직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 시기, 마키구치는 『일본소녀』를 독창적이고 가독성이 높으며 재미있게 만들고자 노력했고, 독자 간의 교류와 참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독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은 에세이, 와카 및 하이쿠 등의 전통 시, 현대시, 그림, 사진, 일화, 숨은그림찾기 혹은 낱말 퍼즐, 와카 및 하이쿠 비평 등으로 다양했다. ‘독자투고란’에는 독자들 간의 편지 교환이 빈번했으며, 집필진과의 질의응답 코너도 운영되었다.
마키구치가 여자교육회와 일본소녀회에서 동시에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일본소녀』 독자들은 여자교육회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원고에 대해 여자교육회 소속 교사로부터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또한 일본소녀회가 조직한 다양한 그룹 토론에 여자교육회의 강사가 참여하기도 했다.

마키구치가 일본소녀회 책임자를 맡게 된 것은 여자교육회와의 연계성과 협력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할은 약 6개월 뒤인 1907년 7월경 끝이 났으며, 이후 그는 자선 교육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예술교육기관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 대중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마키구치와 동료들은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소녀들이 기술을 익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자 했다. 1907년 10월 12일, 여자교육회 부설 여성예술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위원회가 열렸고, 11월에는 여자교육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니조 히로코 공작부인이 취임한다. 그 다음 달에는 여성예술교육기관 설립장소 확보를 위해 여자교육회는 우시고메구 가가초로 이전하게 된다.

여자교육회는 설립 초기부터 가난 속에서도 학습 의지가 강한 소녀들을 특별히 배려하였다. 전선에서 복무 중인 군인의 가족은 입학금을 면제받고 수업료의 절반만 부담하였으며, 초등학교장이 추천해 주위의 모범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우수학생에게는 입학금과 수업료가 모두 면제되었다. 마키구치는 여성예술교육기관 설립에 있어 통학생과 기숙생 모두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교육 과정은 가정학, 재봉 및 자수, 조화 제작 등 전통 수공예, 부기(簿記), 조산술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키구치는 가와고에 강연에서 이러한 구상의 배경을 설명하며, 금전이나 물품의 단순한 지원은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며, 자립할 수 있도록 물질적 그리고 직업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하였다.

1908년 1월 19일, 신주쿠 아이즈미초 소재 아이즈미여학교에서는 여자교육회 졸업식과 정기 구독자 총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마키구치가 여성 교육 분야에서 펼쳤던 활동은 끝나고, 같은 해 4월 여자교육회는 우시고메구 시로가네초로 이전한다. 마키구치와 가까운 인물들의 증언을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여자교육회 활동에 전념하던 시기는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1931년 3월 7일 자 『교육주보』 "저명인사의 약력" 란에 "창가교육학체계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린다. "이후 그는 ‘여성속성강좌’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윤’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마키구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자교육회는 러일전쟁 이후 불황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운영자금 부족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그렇지만 마키구치는 제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을 지닌 소녀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를 통해, 일생에 걸쳐 일관된 태도로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마키구치의 삶의 방식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2010년 7월 12일, 진행: 現 이케다 센터 마사오 요코타 고문이 미국 서던일리노이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듀이 연구센터 소장 래리 히크먼 박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발췌.)

요코타 마사오

1930년 11월 18일은 창가학회가 창립된 날이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이 『창가교육학체계』를 출판한 날이기도 합니다. 의미 있는 날짜이지요. 이케다 다이사쿠 SGI회장도 오늘날 불법(佛法)의 인간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이 자신에게 잠재된 최고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인간교육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와 교육은 때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때도 있는 듯한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래리 히크먼

지난 80년간 이렇게 굉장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근원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깊은 통찰력과 선경지명 덕분입니다. 정말 비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80년 전 당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주의나 교육에 있어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듀이가 1919년 일본을 방문하고 밝힌 소감이 떠오르네요. 그는 일본 사회에는 시민 사회를 뒷받침하는, 예컨대 학부모-교사 협회, 시민단체, 사업가 및 전문직 협회 등의 제도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실상 군대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듀이는 동시에 일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 기쁨을 느꼈다고도 말했습니다. 저는 마키구치 선생님이 바로 교육을 통해 바로 그런 제도적 기반을 만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고 혁신하는 핵심 요소는 교육이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이케다 회장도 자주 말씀하셨듯, 인간주의 종교와 교육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지요. 저는 이케다 회장께서 “종교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육 또한 중요합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정말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요코타: 스스로 생각하도록 장려하지 않는 종교는 억압적이 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요코타 마사오

스스로 생각하도록 장려하지 않는 종교는 억압적이 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래리 히크먼

맞습니다. 미국사회에서 불교를, 특히 창가학회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종교’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서구 종교의 대부분은 위계적 구조를 통해 위에서 아래로 계율과 교리를 전달합니다. 게다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대중적 담론을 편향하는 경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 기관은 교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의 필요나 재능, 관심사를 종교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라고 사색하고 결정하는 개인의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미국인들은 예를 들자면, 아시아의 인본주의적 종교 그러니까 보다 거시적 관점의 종교를 이해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긍정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런 상황은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가깝고, 친밀한 곳이 되어 가고 있으며, 다양한 믿음에 대한 정보를 훨씬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코타 마사오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이들의 ‘행복’을 교육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당시 국가주의적 교육 시스템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되잖아요. 듀이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했나요?

래리 히크먼

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고 했죠. 우리가 어떤 덕목을 기르고, 삶에서 가치를 창조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듀이에게 행복은,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균형을 이루며, 보다 커다란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 가며 성장하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성장의 기회를 주는 데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이죠.

요코타 마사오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이들의 ‘행복’을 교육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당시 국가주의적 교육 시스템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되잖아요. 듀이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했나요?

래리 히크먼

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고 했죠. 우리가 어떤 덕목을 기르고, 삶에서 가치를 창조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듀이에게 행복은,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균형을 이루며, 보다 커다란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 가며 성장하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성장의 기회를 주는 데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이죠.

요코타 마사오

그 말씀은 SGI의 가치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성장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니까요. 그래서 마키구치 선생님도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힘을 중시했습니다.

래리 히크먼

맞습니다. 저는 듀이 연구와 함께 법화경과 이케다 회장의 저작도 공부했는데요, 모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듀이에게 성장이란, 곧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더 많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끝없는 여정이죠.

요코타 마사오

불교에는 ‘변독위약 (독을 약으로 바꾼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뜻인데요.

래리 히크먼

정말 좋은 개념입니다.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듣게 되는 “이 고난은 신의 뜻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패배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게 권위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태도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역경 속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우리 스스로가 책임지고 성장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되지요.
이건 마치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는 일과도 같습니다. 근육은 저항을 통해 자랍니다. 무게를 들어 올릴 때, 한계를 넘어설 때, 근육은 강해집니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근육은 약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걱정도 근심도 없는 모든 것이 완벽한 천국이라는 개념이 좀 불편합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어려움이 없이, 밀어낼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과연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헬스장에서 몸을 키우려고 하는데, 만일 그런 상황이라고 상상해봅시다. 근육을 키우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저항이 없다면 발전도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요코타 마사오

교수님은 일본소카대와 미국소카대 학생들과도 교류해 오셨죠. ‘가치 창조’라는 개념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래리 히크먼

저는 일본과 미국소카대학 학생들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이상에 늘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학생들은 어려움만이 아니라, 자신 앞에 놓인 기회까지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느껴집니다. 캠퍼스를 방문할 때마다 참으로 기쁘고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카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방문 또한 굉장한 행복입니다. 활력 넘치는 학생들은 향학심을 불태우고 있지요. 커리큘럼을 포함, 교사와 학생 간의 교류방식 등 얼마나 많은 고심 끝에 만들어가진 프로그램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듀이의 아이디어가 살아 숨쉬는 학교가 있는가?”라고 질문받을 때마다 소카학원과 소카대학을 이야기합니다. 소카교육기관이야말로 진정한 “듀이식 교육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코타 마사오

방금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래리 히크먼

네.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요. 예를 들어, 외국어 교육과 연계된 해외 유학 프로그램(Study Abroad program)이 있습니다.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이 언어 교육을 줄여가는 현실 속에서, 미국소카대학은 여전히 외국어 공부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경험은 미래의 리더들에게 꼭 필요한 자산입니다.
또 하나는, 학부생들의 학문적 수준과 실질적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입니다. 학생들은 실제 사회 문제를 다루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식적인 과제 수행 차원이 아닌, 현실과 맞닿은 문제에 대한 모색입니다. 이런 측면이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고 부딪혀가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로는, 간사이 소카학원에서 실시하는 반딧불이를 통한 생태계연구와 NASA와 협력해 천문학을 탐구하는 프로젝트 등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은 학생들이 비디오게임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세계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정말 인상 깊은 교육이죠.

요코타 마사오

듀이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깊이 있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 투표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래리 히크먼

맞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다수에 의한 독제체제가 아닙니다. 소수의 권리를 존중해야 비로소 참된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적 권리가 권리장전(權利章典The Bill of Rights)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의견이 아무리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특정한 위협이나 폭력이 아닌 이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요. 이처럼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두 가지가 모두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투표로 결정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그런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저는 듀이가 민주주의를 정의한 방식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그가 내린 정의는 단순히 투표에 국한되지 않고, 특정한 형태의 정부에 대한 정체성조차 초월합니다. 그리고 입헌 군주제, 의회제, 대통령제 등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모두 포괄합니다. 1939년 그가 80번째 생일을 맞아 발표한 멋진 연설 〈창조적 민주주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에서 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스스로 목표와 방법을 만들어가며, 앞으로의 경험을 더욱 질서 있고 풍요롭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 경험의 중심성도 있고, ‘질서 있는 풍요로움 속에서의 성장’도 있습니다. 이야말로 ‘가치창조’가 아닐까요.

요코타 마사오

조금 전 말씀하신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래리 히크먼

그럼요. 어떤 자유를 갖는다는 건,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의 말할 자유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괴롭힘이나 협박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자유롭게 신앙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박해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말이죠. 미국의 권리장전에는 이러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코타 마사오

많은 사람들은 ‘책임’을 ‘의무’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래리 히크먼

맞습니다. 책임은 우리가 가진 권리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책임은 일종의 의무라고 볼 수 있지만, 의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무겁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게) 의무가 있기에 우리 사회의 다른 시민들이 자신의 필요, 재능, 관심사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흔쾌히 의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죠. 의무를 피해야 할 무거운 짐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게는 세금을 낼 책임이 있고, 그리고 저는 그것을 의무로서 받아들여 기꺼이 세금을 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였던 올리버 웬들 홈즈가 말했듯이, 세금은 문명화된 사회를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요코타 마사오

그렇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각 개인이 지닌 잠재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거네요.

래리 히크먼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듀이는,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와 교육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민주주의와 교육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사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래리 히크먼은 미국 서던일리노이대학교 카본데일 캠퍼스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듀이 연구 센터(Center for Dewey Studies)의 소장, 존 듀이 학회 전(前) 회장이다. 히크먼 교수는 미국 철학, 기술의 철학, 영화 연구, 성소수자 권리, 그리고 논리학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서와 논문을 집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