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unesaburo
Makiguchi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Makiguchi Tsunesaburo

시대별 활동

유년기 및 청년기 1871 ~ 1901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01년~1904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천황 <왕정복고 대호령> 발표

1871년 0세 6월 6일

아라하마(현재 일본 니키다현 가시와자키)의 초마쓰 와타나베와 그의 아내 이네의 큰 아들 초시치 와타나베로 태어나다.

*아라하마는 동해의 작은 항구도시로 고기잡이 그물 생산으로 유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버지 초마쓰는 그 지역의 선박회사에서 선원으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1874년 3세 날짜 미상

아버지 초마쓰, 홋카이도에서 일하기 위해 아라하마를 떠나다. 이후 아버지와의 연락은 두절된다.

1876년 5세 날짜 미상

어머니 이네 여사 재혼

마키구치 선생님의 어머니 이네 여사
1877년 6세 5월 9일

젠다유 마키구치와 그의 아내 토리(마키구치 선생님의 고모)에게 입양된다.

1878 ~ 82년 7~11세 날짜 미상

동네 초등학교에서 공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은 공부를 더 하라고 권유했지만, 11세에 양아버지를 위해 일을 시작한다.

1879년 8세 4월 4일

류큐 제도, 일본 오키나와현으로 병합

1884년 13세 날짜 미상

13세에 아라하마의 양부모를 떠나 홋카이도 오타루로 향한다. 몇 년간 그곳 경찰서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며, 독서와 공부에 열중한다.

1889년 18세 2월 11일

천황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4월 20일

홋카이도의 행정 중심지 삿포로에 위치한 홋카이도 사범학교(교사양성학교)에 입학. 당시 사범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한다는 조건하에, 정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890년 19세 10월 30일

천황 <교육칙어> 발표. 1889년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메이지 헌법 공포 이후, 1890년 메이지 천황명으로 발표한 ‘교육에 관한 칙어’.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도의 문어체로 쓰였다. 근대 일본의 도덕적 기본 규범을 정하였고, ‘천황중심’, ‘황통’을 강조했다. 가족과 친구 간의 조화와 우애 및 전시 중의 희생정신을 호소,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국가를 위해 용감하게 목숨을 바치라고 촉구한다. 교육칙어가 공포된 뒤, 학교에서는 주요행사에서 교육칙어를 읽게 했다.
일사회의 군국주의가 심화될수록, 교육칙어는 점점 더 성전의 성격을 띠며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전역의 학생들이 교육칙어를 암기 암송했다.

1892년 21세 6월

홋카이도 사범학교의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육실습생으로 교직을 시작한다.

1893년 22세 1월 11일

이름을 ‘쓰네사부로’로 개명한다.

3월 31일

홋카이도 사범학교를 3등으로 졸업.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고용된다.

홋카이도 사범학교 졸업식
1894년 23세 8월 1일

청일전쟁 시작

청일전쟁(위키미디어 공용)
1895년 24세 날짜 미상

마키구치 가문의 구마 (19세)와 결혼한다.

1896년 25세 1월 10일

중고등학교 지리과목 교사자격 국가고시 합격. 홋카이도 최초 교사자격 국가고시 합격자. 소수의 지원자에게만 수여되는 이 자격증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초등교사에게 중등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897년 26세 11월 1일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홋카이도 사범학교 지리과목 보조교사로 임명된다.

1898년 27세 1월 2일

큰딸 유리 탄생

1899년 28세 3월 29일

큰아들 타미키 탄생

5월 19일

교육부 초등교사 자격증을 받다.

7월 12일

홋카이도 사범학교 동문 정기간행물에 수필 “산과 인생” 기고.

8월 6일

양아버지 젠다유 사망 (향년 56세)

9월

홋카이도 교육연맹 임원으로 임명된다. 연맹 기관지의 편집장으로도 활동

1900년 29세 1월 12일

홋카이도 사범대학 기숙사 책임자로 임명.

3월 28일

교육부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증 취득.

홋카이도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던 시절(1900년)
3월 31일

홋카이도 사범학교 정교사로 임명.

6월 2~3일

홋카이도 교육연맹 이사회 임원으로 선출된다.

1901년 30세 4월 18일

홋카이도 사범학교 사직.

인생지리학 1901 ~ 1912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01년~1912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901년 30세 4월 24일

아내, 아이들과 함께 도쿄로 이주

1902년 31세

저명한 “일본의 풍경론” 작가이자 지리학자인 시게타 시가(1863-1927)를 방문. 마키구치 선생님은 홋카이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작성한 2천 페이지에 달하는 지리교과서 초안을 시가에게 보여준다. 다음해 시가는 초안을 출판할 수 있도록 편집작업을 돕는다.

8월 4일

둘째 아들 젠지 탄생

1903년 32세 10월 15일

마키구치 선생님의 첫 주요저작 ‘인생지리학’ 출간. 시게타 시가의 조언으로 1천 페이지로 편집, 시가의 소개말이 포함되어 있다. 출간 이후 여러 학술지, 신문사, 잡지사로부터 인생지리학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1903년 두 차례 증쇄된다. 이 책은 지리교사자격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을 위한 문부성 필독도서로 여겨졌다.

인생지리학
11월 1일

일본 최고의 교사양성 기관인 도쿄고등사범학교 동문회 총무가 되다.

1904년 33세 1월 3일

1905년 11월까지 출간된 도쿄 고등사범학교 동문 기관지 ‘교육’의 편집장이 되다.

2월 10일

일본, 러시아에 전쟁 선포

날짜 미상

중국 유학생을 위한 ‘고분학원’ 지리과 강의 시작(1907년 4월까지)

1905년 34세 2월 20일

둘째 딸 이즈미 탄생

3월

도아여학교 강사로 고용되다(1907년 4월까지)

5월

여성을 위한 통신교육을 실시하는 ‘대일본고등여학회’를 설립, 총괄 관리자로 근무. ‘대일본고등여학회’는 초등교육을 수료한 젊은 여성들에게 통신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운영된 단체로, 전국의 젊은 여성 교육을 도모하고자 했다. 당시 해마다 초등교육을 수료하는 여학생 수는 수십만 명이었지만, 중학교 여학생 수는 3만 명에 그쳤다.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아들은 물론 딸을 교육시키는 일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9월 5일

일본과 러시아 대표 포츠머스 조약 조인

1906년 35세 날짜 미상

1906년부터 여학생을 위한 통신교육지 ‘대가정(大家庭)’을 편집하고 출판한다.

1907년 36세 2월

2월 잡지 ‘일본의 소녀들’ 출판사의 총괄 관리자로 임명되다.

4월 8일

셋째 아들 요조 탄생

1908년 37세 8월

‘대일본고등여학회’에서 사임하다.

10월 18일

새로운 장(章)을 추가하여 인생지리학 8차 개정판을 출간.

1909년 38세 2월 2일

도쿄 후지미심상소학교 수석교사로 임명되다.

5월 2일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야나기타 구니오(1875-1962)와 만나 교류하며 협력을 시작하다.

1910년 39세 4월 23일

후지미심상소학교에서 사임하다.

6월 21일

넷째 아들 쵸시 탄생.

8월 6일

문부성에 근무하며 지리교과서 편찬에 종사.

날짜 미상

1910년 12월 4일에 창립된 학제간 향토 연구모임 ‘향토회’에 매달 참석하다. 모임에는 교육가이자 외교가인 니토베 이나조(1862-1933), 야나기타 구니오 등도 있었다. 향토회는 니토베 이나조 저택 및 다른 장소에서 매달 모임을 개최, 회원들은 공동체 연구 및 민속전통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향토회는 일본 지역학 연구의 초석역할을 한다.

모임의 회원들과 함께 (왼쪽 맨 끝, 1922년)
1911년 40세 8월

농림상업부 의뢰로 큐슈의 오이타 구마모토현 산간지역에서 설문조사 실시.

1912년 41세 7월 30일

메이지 천황 사망. 다이쇼 시대 개막

11월 23일

‘학교 교육의 통합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연구’를 출간. 이 연구는 초등교육에서 교과지도 간의 유기적 연계가 부족한 점을 비판하고, 연계 강화를 위해 지역사회 연구를 강조했다. 나아가 일상생활과 경험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이 모든 공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초등교육의 전면적 개혁을 제안한다. 이후 이 연구는 ‘경험 기반 교육과정’이라는 새로운 교육운동의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 도쿄(위키미디어 공용)

초등학교 교장 1928 ~ 1927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13년~1927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913년 42세 4월 4일

도세이심상소학교 교장에 취임. 병설학교인 시타야 야간학교의 교장도 겸임하다.
도세이심상소학교는 지금의 도쿄 시내 다이토구에 위치했다. 많은 재학생들이 저소득가정 출신이었고, 학교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이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학용품을 대량구매하여 학생들에게 시장가격보다 저렴하게 나누어주었다.

1919년 다이쇼심상소학교 교장 재임시절
1914년 43세 1월 20일

셋째 딸 츠나 탄생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시작

9월 25일

추가자료를 포함한 인생지리학 제11차 개정판 출간.

1916년 45세 5월 2일

신설 다이쇼심상소학교 교장에 취임(토세이심상소학교 교장 겸임).

9월 25일

‘지리학 교수법 및 내용 연구’를 출간. 본서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헌법 기반의 정치체제에서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이행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지리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교과서는 교사의 의견과 필요를 반영하도록 편집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12월 22일

토세이심상소학교 교장에서 물러나고 다이쇼심상소학교 전임교장으로 근무.

1917년 46세 11월 30일

어머니 이네 여사 사망(향년 69세).

1918년 47세 11월 30일

다이쇼심상야학교 교장 취임(겸임).

1919년 48세 2월 16일

넷째 딸 키미 탄생

12월

다이쇼심상소학교 교장에서 해고. 마키구치 선생님이 지역 유지의 자녀에 대한 특별대우를 거부하자, 도쿄시 행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마키구치 퇴진운동이 시작된다. 마키구치 선생님을 지지하던 학생들의 가족과 동료들은 3일간 수업 거부를 했지만, 결국 마키구치 선생님은 사임을 강요당한다.

1920년 49세 12월 12일

니시마치심상소학교 교장에 취임.

날짜 미상

1920년 초,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상경한 도다 조가이(이후 조세이로 개명) 마키구치를 방문하다. 두 사람은 일본의 미래, 교육이론과 실행에 관해 오래도록 대화한다. 이후 도다는 니시마치심상소학교 임시교사로 고용된다.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17세의 도다 조가이(이후 조세이로 개명).
4월

니시마치심상소학교 교장에서 해고. 다이쇼심상소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분노는 계속된다. 니시마치심상소학교 교장으로 임명된 날, 타가하시에게 의례적 방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직된다. 도다를 비롯한 다른 교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결국 사임을 강요당한다.

6월 22일

미카사심상소학교 및 야간학교 교장으로 취임.
미카사심상소학교는 도쿄 빈민가에 특별 설립된 많은 학교 중 하나로,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장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제공한다.

11월 15일

일본,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 상임이사국이 되다.

1922년 51세 1월 26일

마키구치 선생님의 양어머니 토리 여사 사망(향년 77세)

4월 15일

시로카네심상소학교 교장으로 취임.
마키구치 선생님이 교장으로 근무한 9년 동안, 시로카네심상소학교는 도쿄 초등학교 중 몇 안 되는 우수학교로 인정받는다.

1922년 시로카네심상소학교 학생들과 함께(앞줄 중간)
9월 4~5일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경찰본부에 대중목욕탕 입장료 인하를 요청하는 탄원서 제출.

11월 19일

도다 조세이와 함께 도쿄에서 개최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강연회에 참석.

1923년 52세 5월 25일

‘학교교육 통합 중심의 지역사회 연구’ 8차 개정판 출간.

7월 12일

작은 글자 버전의 인생지리학 개정판 출간. 인생지리학의 마지막 개정판.

9월 1일

간토대지진 발생, 도쿄 및 요코하마 일대가 파괴되다.


1923년 간토대지진(위키미디어 공용)
9월 17일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로카네심상소학교 학생들이 간토대지진 희생자 구조활동을 위한 모임을 조직한다. 5~6학년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학교 주변을 돌며, 옷을 나누어줬다.

1924년 53세 9월

도다가 창립한 사설학원 시습학관의 완공식에 참석하다. 도다는 메구로역 근처 빈터를 임대해, 2층 건물을 짓는다. 이후 20년 동안 시습학관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학습방법을 도입해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훌륭한 성과를 달성하고 명문학원의 입지를 굳힌다.

도다 조세이(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시습학관에서(마키구치 선생님,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12월 11일

둘째 아들 젠지 결핵으로 사망(향년 22세).

1925년 54세 3월 29일

일본의회 보통선거법(남자) 통과

4월 22일

치안유지법 발효. 1925년 시행된 치안유지법은 같은 해에 제정된 남성 보통선거법을 견제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사유재산 제도나 일본 천황제를 변경하려는 조직에 가입하는 경우, 최대 10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1928년과 1941년 두 차례 개정되어, 금지하는 활동 범위를 넓히고 사형을 도입해서 처벌 강도를 높였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에서 반체제 사상을 억압한 주요 수단으로, 수만 명이 감금, 체포, 기소되었다. 공식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수감자 상당수가 고문과 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뒤 점령당국에 의해 이 법은 폐지되었다

1926년 55세 12월 25일

다이쇼 천황 사망. 쇼와 시대 개막.

1927년 56세 4월 6일

마키구치 선생님의 오랜 친구로, 인생지리학 출간 준비를 도와준 시게타 시가가 패혈증으로 사망. 마키구치 선생님은 담당의사에게 수혈을 위해 자신이 헌혈하겠다고 제안하나, 당시 일본의 의료기술로는 역부족이라는 답변을 듣게 된다.

5월

마키구치 선생님의 노력으로 시로가네심상소학교를 새롭게 3층 콘크리트 시설로 보강.

창가교육학체계 1928 ~ 1936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28년~1936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928년 57세 6월

메지로상업학교 교장 미타니 소케이(1878-1932)와 만나다. 미타니는 니치렌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유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10일 동안 입정안국론 및 다른 어서에 관해 대화한 후, 니치렌 불법을 신앙하기로 한다. 이후 마키구치 선생님의 권유로 도다 선생님도 입신.
1935년 자신의 교육이론을 요약한 책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창가교육학체계 연구가 궤도에 오르고 제1권 발간을 준비하며, 법화경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나의 종교관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중략) 법화경은 우리 일상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철학적 원리와 전혀 모순이 없으며,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종교적∙도적적 실천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러한 법을 알게 되어 감동하고 있는 사이, 나의 생활에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을 경험했다. 참으로 법화경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로 거의 60년에 이르는 삶의 근간을 새롭게 다졌다.”

1929년 58세 5월 31일

큰아들 타미키 결핵으로 사망 (향년 30세).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대공황의 전조

1930년 59세 2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서적 출간에 관해 논의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자신의 교육철학의 목적은 ‘가치창조’라고 강조하자, 도다 선생님은 서적의 제목을 ‘창가교육’으로 제안한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1930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1928년)

창가교육학체계 개요 출간.
창가교육학체계 안내서로서 총 12권 발간을 예정했으나, 핵심사상 중심으로 총 4권 발간.

11월 18일

창가교육학회 창립과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 출간.
창가교육학체계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원고를 도다 선생님이 편집 출간했다. 창가교육학회에 의해 제1권이 출간되었고, 그 출간일을 오늘날 창가학회 창립의 날로 기념한다. 제1권에서는 교육이론과 실천적 방법론을 논하고, 학습자의 평생 행복이 교육의 참된 목적이라고 정의한다.

창가교육학체계
창가교육학체계
11월 20일

교육잡지 “환경”(발행인: 도다 조가이)에 훗날 총리가 되는 이누카이 쓰요시(1855-1932)를 비롯한 저명인사 28명의 “창가교육학 지지 선언문”이 게재된다.

저명인사 28명의 “창가교육학 지지” 서명
28명의 저명인이 이름을 올린 찬사 '창가교육학'
1931년 60세 3월 5일

창가교육학체계 제2권 출간. 제2권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마키구치 교육철학의 토대인 ‘미(美)∙이(利)∙선(善)’의 가치를 중점적으로 논한다.

4월 10일

아자부신보리심상소학교 및 부속 야학교의 교장으로 임명. 아자부신보리심상소학교는 이미 1년 내로 폐교가 결정된 학교. 지속적인 탄압으로 마키구치 선생님의 전근이 결정되었다. 폐교와 함께 마키구치 선생님은 교직을 떠나게 된다.

7월

새롭게 건립한 일련정종 간키료사(寺)의 주지 호리고메 타이에이(이후 니치준 상인)를 방문하다. 호리고메는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일련정종 승려 중 경전 비평과 분석을 현대적으로 연구한 몇 안 되는 학승으로, 그는 재가신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재가신도에게도 승려와 같은 강론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18일

관동군이 평텐 (지금의 선양) 부근의 철로를 폭파하며 만주사변을 일으킴.

1932년 61세 3월 1일

만주국, 오직 일본만 인정하는 꼭두각시 국가로 건국.

3월 31일

아자부신보리심상소학교 폐교. 마키구치 선생님의 오랜 교직생활도 끝나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퇴직금의 절반은 메지로의 자택 개조에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창가교육학체계 출간 자금으로 도다 선생님에게 맡긴다.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 총리 암살당하다. 쿠테타는 실패로 끝나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의 민주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7월 15일

창가교육학체계 제3권 출간. 제3권에는 ‘중앙정부의 감사 폐지’. ‘반나절 학교제도’ 등 교육 개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제안이 포함되어 있다.

10월 3일

넷째 딸 키미 사망(향년 13세).

1933년 62세 3월 27일

천황 칙령으로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공식 탈퇴한다.

4월 5일

‘학교 교육 통합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연구’ 제10차 개정판 출간.

1934년 63세 6월 20일

창가교육학체계 제4권 출간. 제4권에서는 창가교육의 방법과 구체적인 교육과정이 나와있다.

가을

창가교육학회에 많은 청년 교육자들이 모인다.

1935년 64세

좌익 성향의 교육자들에 대한 경찰의 강한 탄압으로 해고당한 나가노현 출신의 청년교사들과 만나다. 그들에게 사회 개혁을 위한 법화경과 막르크스주의의 상대적 적합성을 주제로 강의. 여러 명의 청년교육자들이 창가교육학회에 가입한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창가교육학회 연구부서가 만들어진다. 30명으로 구성된 연구회는 창가교육학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10가지 분야를 탐색한다.

창가교육학체계 안내서 출간. 후기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법화경과 창가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니치렌 불법을 신봉하게 된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니치렌 불법과 창가교육의 공통점을 논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믿음’은 종교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여름

창가교육학회 정기간행물 ‘신교(新敎)-발행인 도다’ 발간.

신교(新敎)
신교(新敎)
1936년 65세 1월 19일

‘후지문류(富士門流)의 핵심 가르침’을 주제로 실시한 제1회 연수회에 참석. 이 모임은 일련정종 前 법주 호리 니치코 상인이 주관한 첫 번째 연수였으며, 마키구치 선생님은 연수의 주창자 중 한 명이었다. 연수 종료 후, 마키구치 선생님은 교육개혁∙종교개혁 연구회 모임에 참석한다.

5월 28일

‘신교’의 긴급이사회에 참석해 새로운 편집방향을 논하다. 기관지 이름을 ‘교육개혁’으로 변경하기로 의결.

8월 13 ~ 16일

일련정종 본산 대석사에서 개최된 창가교육학회 제1회 연수 참가.

불교운동 1937 ~ 1941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37년~1941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937년 66세 1월 27일

창가교육학회의 공식 발족식에 참석하다. 최초 회원 명단에 100여 명의 이름이 기재된다.

7월 7일

중일전쟁 본격화

9월 5일

‘창가교육학의 과학적∙초종교적 경험 실증’ 소책자 발간.
이 책은 창가교육학의 초기 연구를 실용적 방법으로 분석하고, 창가교육학의 근간을 이루는 니치렌 불법의 타당성을 경험적 실증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가치창조’야말로 보편적 교육방법이라고 논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불법의 인과이법(因果理法)의 엄격함을 강조한다.

날짜 미상

‘국가 교육정책에 관한 6가지 현안’ 소책자 발간.

* 6가지 제안
1. 반나절 수업제도
2. 초등학교 교장 임명 시험제 도입
3. 사범학교 교육과정 향상
4. 국가교육정책위원회 설립
5. 국가교육연구시설 설립
6. 교과지도의 과학적 교수법 도입

1938년 67세 7월말

가고시마현 방문, 좌담회에 참석하고 절복활동을 펼친다. 이 무렵, 인과이법의 엄격함을 적극 강조하며 절복에 매진한 마키구치 선생님의 활동 덕분에 창가교육학회 회원이 급증한다.

1939년 68세 3월 25일

셋째 아들 요조와 이나바 사다코 결혼

1939년 3월 25일 아들 요조와 이나바 사다코의 결혼식에서.
5월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을 기반으로 한 학교 설립과, 제자인 도다가 이 구상을 실현할 것이라는 기대를 이야기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며느리 사다코 여사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말씀을 회상한다. “장차, 내가 아니 혹시라도 내가 할 수 없다면 도다가 반드시 내가 연구해온 창가교육학을 실행할 학교를 설립할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창가교육학을 일관적으로 시행할 학교가 생길 것이다.”

12월 23일

도쿄 아자부에서 개최한 제1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60여 명 참석.
이즈음, 마키구치 선생님의 종교적 신념은 더욱 깊어진다. 교사가 아닌 비교사 회원수가 증가하자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회를 교사 중심의 단체에서 교사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단체로 변경하기 시작한다. 조직의 목적 또한 ‘교육변혁’에서, ‘종교변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변혁’으로 변경한다. 12월23일 회합에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경제인과 일반인들도 참석했는데, 실질적으로 창가교육학회의 제1회 총회가 되었다.

1939년 제1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앞줄 중앙)
1940년 69세 7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주도하에, 다양한 경영활동에 종사하는 30여 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경제인 그룹을 결성해 매달 좌담회를 실시하게 된다.

9월 27일

이탈리아, 독일, 일본 삼국동맹조약 조인

10월 20일

도쿄 쿠단에서 개최된 제2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3백명 참석.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창가교육학회 회장으로 추대된다.
당시 연구부장 겸 이사장이었던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회장으로, 도다 선생님은 이사장으로 임명된다. 학회 조직은 12명의 이사진, 기획부를 포함한 10개 부서로 확대되고, 조직의 목표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학회의 새로운 목표는 교육변혁이 아니라, 종교를 토대로 하는 사회개혁으로, 창가교육학회의 주요한 역할은 종교운동으로 탈바꿈한다.
“학회는 교육∙종교∙생활변혁을 통해 국가와 국민의 행복을 추구한다. 삼대비법(三大秘法)에 대한 강성한 신심의 실증을 나타내고, 가장 숭고하고 고결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또한 학회원의 소개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일련정종의 신도로 등록되지 않고 자동적으로 학회원으로 간주되었다. 학회는 일련정종으로부터 독립된 단체로 운영되었다.

1941년 70세 날짜 미상

치안유지법 조항이 개정∙강화된 1941년 5월15일부터 창가교육학회 간부들이 대거 체포된 1943년 6월30일까지, 마키구치 선생님은 240차례 좌담회에 참석, 회원들을 격려하고 절복 홍교활동을 호소한다. 당시 참석자들은 특고경찰의 감시 속에서 열린 좌담회를 회상하며, 국가신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경찰은 즉시 마키구치 선생님을 중단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이 기간에도 마키구치 선생님은 간다에 있는 본부 혹은 자택에서 회합을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개인지도에 임하며, 절복활동과 신심지도는 물론 매달 간부회도 실시했다.

1941년 규슈 후쿠오카에서 창가교육학회 회원들과 함께 (앞줄, 중앙)
4월 13일

일본과 소련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7월 20일

새로운 기관지 ‘가치창조’ 창간.

11월 2일

도쿄 간다에서 제3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개최, 4백 명 참석. 이 자리에서 도쿄 13개 지부, 지방 9개 지부로 총 2천여 명의 회원이 소속해있다고 발표.

도쿄 이케부쿠로 좌담회에서(1942년).
12월 5일

가치창조 제4호에는 창가교육학회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법화경의 진수 삼대비법을 수지하는 신도들로 구성된 우리 학회는 만인의 평화와 안온을 추구한다. 일상에서 신심 즉 생활을 실천, 종교와 생활 간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실험관찰하며 실증을 나타내고, 가치를 창조한다…. (중략) 지난 10년간 우리 동지들의 절대적 헌신과 실천 덕분에 이러한 실증을 증명함으로써 세계 어디에도 전례 없던 모범을 구축해왔다. 우리는 지금 막다른 벽에 부딪힌 나라와 세계를 위해 돌파구를 여는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6가지 구체적 제안이 이어진다.
1)교육방법개혁    2)생활방식개혁    3)연구방법개혁    4)도덕성개혁    5)철학개혁    6)종교개혁

시즈오카에서 개최된 제4회 창가교육학회 연수회 참가자들과 함께. (셋째 줄 왼쪽 세 번째)
12월 7일

일본, 진주만 공격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2월 9일

제1회 청년부 회합에 참석하다 (33명 참석).
전쟁 중 좌담회 및 기타 활동 운영 방법에 대해 지도하고, 청년에 대한 희망을 밝히다.

1941년 70세 (계속) 12월 20일

가치창조 제5호에서 정부의 종교탄압 비판. “실제로 입증할 수 없는 근거가 불확실한 사상은 결코 추종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인을 포함한 전체 사회의 소중한 생명을 절대로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압적 신사참배는 재검토해야 할 엄중한 문제가 틀림없다.”

전쟁에 저항한 불교도 1942 ~ 1944

세계 및 일본 사회 관련 내용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연대기 (1942년~1945년)
연도/나이 날짜/내용
1942년 71세 2월 15일
1942년 겨울 자택에서
2월 15일

일본군, 싱가포르 침략

5월 10일

기관지 ‘가치창조’ 마지막 호 발간. 내각정보부는 ‘가치창조’를 “불필요 기관지”로 지정하고 출판 중단을 명령한다.

5월 17일

도쿄 간다에서 열린 제4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4백 명 참석. 총회에서 도쿄 19개 지부, 지방 11개 지부 편성이 발표되었다.

5월 17일

도쿄 간다에서 열린 제4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4백 명 참석. 총회에서 도쿄 19개 지부, 지방 11개 지부 편성이 발표되었다.

6월 4~7일

미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

11월 22일

도쿄 간다에서 열린 제5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6백 명 참석. 마키구치 선생님은 총회에서, ‘신자(信者)’와 ‘행자(行者)’의 차이를 강조하며, 권력과 사회적 반응이 두려워 절복을 실천하지 않는 일련정종 종문의 승려들을 맹렬히 비판한다. 총회에서 회원수는 4천여 명으로 발표되었다.

1943년 72세 5월 2일

도쿄 간다에서 개최된 제6회 창가교육학회 총회. 700명 참석.

6월 27일

일련정종 종문(宗門)은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 그리고 6명의 이사들을 대석사로 소환한다.
당시 법주인 닛쿄 스즈키가 참석한 자리에서, 대석사의 행정부는 정부가 신찰(*국가신도 부적의 일종)을 받도록 요구했고, 일련정종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했다고 알린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에게 창가교육학회 또한 신찰을 받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마키구치 선생님은 불법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라며 단호히 거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찰은 절대로 받지 않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도다 선생님은 대석사에서 돌아오며 나눈 마키구치 선생님과의 대화를 회상한다. “내가 한탄하는 까닭은 하나의 종파가 멸망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 나라가 눈앞에서 멸망해 가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지금이야말로 국가간효의 때가 아니겠는가. 도대체 종문은 무엇을 겁낸단 말인가.”
다음날 대석사 하산 직전 마키구치 선생님은 법주를 만나 다시 한번 국가권력에 맞설 것을 호소하지만, 법주는 이를 거절하고, 탄압을 피해간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신찰 거부 이후, 권력당국은 창가교육학회에 대한 전면적 압박에 박차를 가한다.

6월 29일

창가교육학회 이사 2명이 경찰에 의해 구금되다.

7월 6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금의 시즈오카현 시모다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신도 및 천황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불경죄 혐의로 특고형사 2명에게 연행된다. 같은 날, 경찰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자택을 급습, 서류와 기타 자료를 압수한다. 이 날, 도다 선생님과 창가교육학회 다른 간부들도 같은 혐의로 도쿄에서 연행된다. 다음은 특고경찰의 월간보고서 <특고월보> 7월호 내용의 일부이다.

"마키구치 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의 전반적 사상과 신념은 저항적이고 폭동을 선동한다. 경찰본부와 후쿠오카 특수경찰의 감시보고서에 따르면, 마키구치는 회원들에게 '천황도 범부이다.' '천황 자신이 국민들에게 충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천황에 대한 충성강요는 교육칙서에서 삭제해야 한다.' '법화경과 니치렌을 비방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세신궁에 가서 예배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가르치며 폭동을 선동해왔다."

7월 7일

시모다에서 도쿄 경시청으로 이송.
며느리 사다코 여사가 당시 마키구치 선생님을 면회했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단 신심만큼은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후, 더 이상 면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든 면회권이 철회되었다.

9월 25일

도쿄의 스가모구치소로 이송. 이송 중 제자 도다와의 짧은 만남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도쿄 스가모구치소 (위키미디어 공용)
10월 13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스가모구치소에 400여 일간 수감된다. 혹독한 취조 중에서도 취조자들에게 불법 교의를 계속 설명하고, 가치론을 논한다. 가족에게 주기적으로 엽서는 보낼 수 있었다. 취조를 담당한 검사는 구치소 병동으로 이송하도록 여러 차례 제안했으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끝까지 거부한다.

구치소 독방
1944년 73세 10월 13일

며느리 사다코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칸트의 철학을 정독했다. 지난 100년간 학자들이 시도했지만 손을 대지 못한 ‘가치론’을 내가 저술하고, 나아가 이것을 법화경 신앙에 결부시키고 또한 수천 명이 실증을 낸 것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그렇기 때문에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며 법화경의 가르침대로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구치소에서 보낸 마지막 엽서
11월 17일

부축을 거절하고 혼자 걸어서 구치소 병동으로 이동하다.

11월 18일

오전 6시경, 73세의 마키구치 선생님 노환과 영양실조로 병감 침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1945년 3월 9 ~ 10일
얄타회담, 1945년 2월(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도쿄 대공습으로 약 10만명 사망

미국의 공습, 1945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7월 3일

도다 선생님 출옥.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원폭 투하 후의 히로시마, 1945년 8월(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8월 8일

소련이 만주국, 사할린, 쿠릴 열도와 한국을 공격하다.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8월 15일

일본 천황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