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unesaburo
Makiguchi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Makiguchi Tsunesaburo

생애

지식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서 비롯되는 환희와 열정을 북돋아야 한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 선생님은 일본 서해안의 작은 바닷가마을인 아라하마(현재 니가타현)에서 태어나, 일본 북쪽 섬 홋카이도의 오타루에서 대부분의 청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오타루는 당시 일본의 근대산업화 과정에서 시범도시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역 경찰서 사환으로 근무하며 다방면에 걸친 독서와 면학에 힘써, 홋카이도 삿포로에 위치한 교사양성기관 ‘홋카이도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어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보다 넓은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지방도시에서 생활하며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직접 체험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지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듯하다. 또한 선생님은 권력을 손에 쥔 엘리트계층과 무력한 대중 간의 커다란 격차를 직접 체험하게 되고, 이때의 경험 역시 이후 교육자의 길에 들어설 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등교사 자격을 얻은 뒤 몇 년간, 마키구치 선생님은 삿포로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지역교원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후 1901년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로 이주했고, 1903년 32세의 나이에 첫 번째 주요 저작 ‘인생지리학’을 출간했다.

1913년 도쿄의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마키구치 선생님은 저작활동을 비롯해 교육계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교육잡지 편집, 공교육 기회를 거부당한 젊은 여성들을 위한 통신교육사업 및 도쿄에 위치한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고, 교육부의 교과서 개발에도 참여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공동체 연구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했고, 공동체 연구야말로 공교육에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역 공동체와 문화 활동에 관한 체계적 연구에 종사하던 저명한 학자들과도 교류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 (1940년 11월)
도다 조세이 선생님과 함께 (1928년)

1913년부터 1932년까지, 도쿄의 빈곤지역을 포함한 여러 초등학교에서 연이어 교장생활을 하며,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교육이론을 실용적인 형태로 개선해나간다. 교육자로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어린이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했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학생들이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마키구치 선생님은 여러 차례 지역 정치인 및 기득권 세력과 충돌하게 되고, 선생님을 몰아내려는 시도 또한 빈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카네 심상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포함해 마키구치 선생님이 교장으로 근무했던 학교는 양질의 교육과정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60세에 접어들 무렵, 마키구치 선생님은 인생의 여러 전환점을 맞이한다. 1928년 니치렌 불법에 귀의하고, 1930년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출간하며, 1932년 오랜 교직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니치렌 불법과 법화경의 가르침에서 자신이 평생에 걸쳐 전개해온 사상, 즉 창가교육학체계의 토대가 된 사상과의 깊은 공명을 느낀다. 제자 도다 조가이(이후 도다 조세이로 개명)는 마키구치 선생님이 교직생활을 하며 적어놓은 방대한 양의 메모와 기록을 정리해 출간을 준비한다. 총 4권으로 편집 출간된 창가교육학체계에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가치론의 개요가 담겨있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학습자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도전과 기회를 통해 가치(행복)를 창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은 1930년 11월18일 출간되었고, 이 날을 창가교육학회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창가교육학회는 전쟁 후 창가학회로 이름을 바꾼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 회원이 있고, 일본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불교재가단체이다. 창가학회의 전신(前身)인 창가교육학회의 최초 목적은 창가교육학체계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교육 개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거치면서 니치렌 불법 홍교를 통한 사회 개혁으로 확대되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회 활동 나아가 불법 홍교에 전념했고, 일본 전역을 다니며 좌담회를 개최하고 회원을 격려했다.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이 출간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공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일본 군국정부는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생활 전면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천황을 신격화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 사상을 더욱 강화한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종교활동은 권력당국의 눈에 띄게 되고, 활동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진다. 급기야 마키구치 선생님과 창가교육학회 회원들에게 ‘국가신도 사상을 숭배한다’는 증거로써 신찰(국가신도의 부적과 같은 족자) 예배를 강요한다. 이를 거부하자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비롯한 창가교육학회 간부들은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연행되어 1943년 7월 구금된다. 권력당국은 당시 70대였던 마키구치 선생님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압박하고 혹독하게 취조하며 극한의 고난 속으로 몰아넣는다. 체포된 대부분의 창가교육학회 회원들은 끝내 퇴전(退轉)하고 말았지만,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1944년 11월 마키구치 선생님은 영양실조와 노환으로 옥사한다.

1945년 7월, 마키구치 선생님의 애제자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출옥한다. 도다 선생님은 스승 마키구치와 자신이 창립한 창가교육학회 재건에 착수, ‘창가학회’로 이름을 바꾼다. 창가학회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불교단체 중 하나로 발전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교육사상은 도다 선생님의 후계자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에 의해 실현되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유치원부터 대학원에 이르는 창가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창가교육이론에 대한 연구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창가교육에서 착상한 혁신 프로젝트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